지금, 가상의 행성을 상상한다는 것

김명진

Planet HTRAE Project(이하 P.H.P.)의 여정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지금 이 전시장이 하트레(HTRAE)라는 어느 낯선 행성의 흔적들로 채워져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다른 행성에 거주하는 지구인의 모습을 상상해본 적이 있나요? 누군가는 지구의 종말을 지연시키며 지구와 운명을 함께하기를 바라고, 다른 누군가는 지구 밖에서 미래를 만들어나갈 인류를 상상할 것입니다. 외계 행성을 인간이 살기 적합한 환경으로 바꾸는 것을 ‘지구화’ 작업이라 하는데, 이는 수백 년 또는 수천 년 동안 여러 세대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런 상상을 할 때는 언제나 자연과학적 사실 관측과 사회적 가치판단의 문제가 버무려집니다. 천문학은 인간의 주관적인 신념을 기반으로, 특히 그 시대의 세계관을 기반으로 형성되어왔습니다. 과학적, 특히 천문학적 가설의 역사는 인문학적 신념의 역사이기도 한 셈이지요. 여기에서 예술이 개입할 지점이 생겨납니다.

 

이와 관련한 오래된 상상의 전통이 있습니다. 19세기의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은 '화성 운하설'을 제기하며 화성 전역에 지적 생명이 설치한 용수로 시스템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물론 20세기부터 이루어진 화성 관측은 그 가설이 허구임을 입증했지만, 칼 세이건(Carl Sagan)은 로웰의 운하가 단지 착각이 아닌 훌륭한 예언으로 간주될 수 있음을 옹호하며 "미래의 지구인은 로웰의 화성인"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¹ 그리고 그는 '화성의 지구화' 프로젝트를 거시적 관점에서 추진해야 한다고 했죠. 이제 우리는 꽤 생생한, 지구의 사막과 닮은 화성의 영상을 유튜브에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많은 시간이 지나면 과연 화성에도 물이 흐르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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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P.는 천문학적 상상력과 미술 생활을 결합해보려는 시도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이 여정은 기획자와 작가 모두에게 미술을 통해 ‘미술 바깥’에 있다고 여겼던 세계와 연결되는 과정이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책을 읽으며 입자이자 파동인 빛의 세계에 매혹을 느끼기도 하고, 납작한 2차원의 세계와 그곳의 거주민들이 차원을 넘어 '위'의 개념을 상상할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고, 보이저 호(Voyager)의 황금 레코드에 담긴 메시지가 외계 생물체에게 해독될 순간을 상상하기도 하며 즐거워했습니다.

 

김은주 작가의 회화에서는 이처럼 미술가가 자연과학을 만나 작업 세계를 확장해 나갈 때의 즐거움이 드러납니다. 작가가 만들어낸 이미지는 낯선 행성의 형상과도 닮았고, 실험실에서 볼 수 있을법한 관찰된 물질의 미시적 형상과도 닮아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조형 세계를 찾아나가는 방식은 마치 물질을 쪼개어 기본 단위를 찾아가는 관찰자의 여정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면밀한 ‘관찰’은 과학과 미술 양쪽에서 큰 의미를 지니는 행위입니다. 어느 실험에서 관찰자의 유무에 따라 빛의 움직임 패턴이 달라졌다는 기묘한 이야기²는 한 존재를 바라보는 다른 존재의 힘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는 자연과학과 조우하면서 세계와 함께 우리 자신을 관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팬데믹과 기후위기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생각할 때, ‘내일’이라는 단어의 단상은 어둠 속에서 간신히 새어나오는 얇은 빛줄기의 감각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1980년대에 쓰여진 『코스모스』에서 인류에 대한 희망적 메시지가 두드러져 보였다면, 근래의 S.F. 소설들에서는 우주를 향한 상상력보다 지구인에 관한 사회학적 통찰의 쓴맛이 표면에 드러나는 듯합니다. 즉 오늘의 S.F.는 우주에서의 미래가 하나의 ‘인류’가 아닌 개개인의 것이며, 특히 자본의 유무에 따라 사뭇 다르게 펼쳐질 서사임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다른 행성의 ‘지구화’ 작업이 인간만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이 다른 생태계에 대한 ‘폭력’이 아닌지를 질문해야 합니다. 혹은 우리의 존재 자체가 폭력이 아닌지를. 언젠가 조미형 작가는 “신체를 가지고 있는 한 폭력은 숙명”이라고 한 메를로-퐁티의 통찰³을 좋아한다고 말했습니다. 생명의 본질이란 다른 종류의 생명을 해하지 않고서는 한시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식물작업실 ‘언타이틀 플랜트’를 운영하는 조미형은 오랜 시간 취미이자 생활로, 그리고 작업으로 식물을 마주하며 그 다층적인 면을 탐구해왔습니다. 인간을 위해 환경을 개선하는 다정한 존재로 오해되어 온 식물은, 스스로를 위해 강한 생존본능을 지닌 생명이자 인간에 의해 통제되는 도시의 산업체입니다. 또한 식물은 때에 따라 폭력적이며, 다른 행성을 침투하는 지구의 ‘군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칼 세이건이 지구의 이끼를 “자기와 같은 소형 기계들을 복제하는 까무잡잡한 소형 기계”라고 표현하며, 이들이 화성 ‘지구화’의 초기 단계에서 대기를 생성하는 역할을 수행하리라고 기대했던 것처럼.⁴ 작가는 외계에 씨앗을 심는 일을 상상하며 씨앗을 일률적으로 배열하고, 작고 단순화된 터치로 캔버스 위에 ‘파종’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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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문영 작가는 인간이 하늘을 바라보는 방식에 초점을 두어 공간을 구성합니다. 오랜 시간 지구에서 하늘을 관찰해 온 사람들은 '항상성'과 '변수'라는 하늘의 두 속성에 맞닥뜨려 왔습니다. 지구의 자전 주기, 공전 주기를 예측하는 일보다 내일의 날씨를 예측하는 일은 항상 더 불확실합니다. 이는 천체의 규칙적인 운동을 관측하는 ‘정확한 과학’인 천문학과, 늘 대기의 예측하기 힘든 사건들과 마주하는 ‘확률적 과학’인 기상학의 차이를 드러냅니다.⁵

 

그렇다면 수없이 축적된 ‘과거의 일기예보’들은 반복되는 예언 혹은 착각의 데이터로, 현실과 다른 가능성을 나타냈던 일종의 픽션으로 읽힐 수 있을 것입니다. 이문영의 <여백의 일기>는 날씨에 관한 통계적인 정보와 픽션, 진실과 착각이 뒤섞인 이미지로, 이는 전시 전체의 주제와도 공명합니다. 하나의 전시로서 P.H.P.는 외계 행성의 이미지인지, 혹은 그렇게 보이는 지구의 이미지인지 모를 픽션을 생산해내는 작업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과학의 성질이 원인-결과를 토대로 세계를 바라보고 서술하는 것이라면, 작가의 작업은 그 인과적 서술의 빈틈으로부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일에 가까울 것입니다.

 

다른 행성을 상상하며 다시 지구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한 하늘이 '지구에서 올려다 본' 하늘뿐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모든 행성에서 태양과 달과 별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대기가 구름으로 뒤덮인 화성에서 태어났더라면, 천체를 바라볼 수 없음으로 인해 의미의 좌표들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이는 인간은 지구라는 미디어 위에 있고, 그렇지 않았다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우주를 지각했거나 하지 못했을 것임을 의미합니다. 마치 시각 언어를 통해 말하는 우리에게 미술이 그러한 것처럼, 지구는 인간에게 주어진 제한이자 가능성인 셈입니다.

¹) 칼 세이건(홍승수 옮김), 『코스모스』, 273쪽.


²) 20세기 말 과학자들이 광자(photon, 빛의 최소 단위)를 토머스 영(Thomas Young)이 고안한 이중 슬릿에 통과시켜 빛의 파동에 의한 간섭 패턴을 관찰한 실험을 말한다. 이 실험에서는 관찰자가 지켜볼 때에는 광자들이 똑같은 크기의 두 덩이로 나뉘어 모인 모습이 나타났고, 지켜보지 않을 때에는 충돌하는 두 파동의 간섭 패턴이 생겨났는데, 이처럼 기묘한 결과의 원인은 아직까지 설명되지 못하고 있다. 앤 드루얀(김명남 옮김), 『코스모스: 가능한 세계들』, 312-314쪽 참조.


³) “우리는 순진무구함(비폭력)과 폭력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폭력의 종류를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체를 가지고 있는 한 폭력은 숙명이다.” 메를로-퐁티의 이 문장은 김순아, “[인문학 칼럼] 존재 자체가 폭력이다!”, 양산신문, 2020.11.04.에서 재인용.


⁴) 칼 세이건, 앞의 책, 270-271쪽 참조. 


) 존 더럼 피터스(이희은 옮김), 『자연과 미디어』, 235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