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LJI-RO

진지현 solo exhibition

《파람, 파람, 파람》

2025. 5. 21. - 6. 8.


구름을 뚫는 꽃


2024년 여름, 풀리지 않는 고민을 안고 작업실 옥상에 올랐다. 고요한 아파트촌 위로 달빛이 비추 고 있었다. 언제나 나를 바라보던 달, 그날은 내가 달을 바라보았다. 달빛을 따라 나의 존재를 느 끼고, 달을 감싸는 구름을 보았다. 달빛이 나를 비추고, 구름이 달을 안아주는 듯한 순간—나는 그 찰나에 하나로 연결되는 감각을 경험했다. 


옥상의 작은 화분에서 자란 풀꽃을 꺾어 달과 구름 아래 두었다. 시야의 장난처럼 구름 사이를 뚫어 보았다. ‘구름을 뚫는 꽃.’ 사실 구름은 무엇으로도 뚫린다. 마치 막막한 고민과 걱정도 결국 은 뚫릴 수 있는 것처럼. 달이 나를 비추었듯이, 삶도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흘러간다. 


이렇게 ‘구름을 뚫는 꽃’ 시리즈를 시작했다. 땅을 뚫고 피어나는 아이리스의 꽃대처럼, 달을 향해 날아가는 새들처럼, 세계를 깨는 일은 매일 일어나고 있다. 이 전시는 달을 향한 모두의 염원과 해결되지 않는 외로움이 쌓인, 내가 사는 이곳을 담고자 했다. 


내 그림은 무력함 속의 외로움과 간절한 바람이 켜켜이 쌓인 조합이다. 가로와 세로의 선이 무수 히 반복되고, 물감의 교집합처럼 삶의 사이를 빗겨 사는 것 같아도 결국 모두 삶을 정면으로 맞 이하고 있다. 빛을 그리기 위해 어둠을 쌓아가며, 나는 어둠 속에서 빛을 향해 고군분투하는 이들 의 움직임을 닮은 붓질을 남겼다. 작은 붓으로 나의 세계를 깨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작가노트 - 진지현

하늘의 모서리


화폭의 가장자리, 거칠게 자리 잡은 네모난 틀이 있다. 이 사각형은 액자나 캔버스 이전에, 커다란 종이의 일부로서 그림이 될 준비를 하는 영역이다. 하얗고 무고한 도화지에서 선택된 이 네모난 영역은 앞으로 진지현의 그림 속 하늘이 된다. 이 하늘은 시간이 흐르지 않고 늘 그 자리에 있으면서 영원한 언약도 맺지 않는다. 그렇다고 늘 맑고 쾌청한 것도 아니어서 오 히려 어중간한 어둠이 깔린 밤하늘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좋겠다. 아니, 그것보단 일식(日蝕) 으로 태양이 빛을 잃은 맑은 어둠의 하늘이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작가는 그림을 그리기에 앞서 커다란 종이에 프레임을 두르고 시작한다. 하늘에 모서리가 생기고, 크고 작은 사각형이 모여서 크고 작은 세상이 만들어지는데, 이 프레임은 진지현이 세상과 그림을 구분 하는 경계이자 그가 만들어놓은 세상의 가장자리로 기능한다. 그리고 남색, 적갈색, 짙은 녹색 등의 간결한 색감으로 구성된 이 무대 위에 몇몇 등장인물들이 출현한다.


이것들을 인물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새, 꽃, 구름, 별, 달과 같은 것들이 개별적으 로 혹은 동시에 등장한다. 이들은 모두 딱히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화려하지 않다. 그래서 그 냥 지나치기 쉽고 어떤 거대 서사나 거창한 비유 없이 소박하다. 이들은 별 대사 없이 서로 소통하고 각자의 자리에 가서 조용히 앉는다. 혹은 그저 각자의 자리를 표시하는 장소이다. 이것들을 장소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이들은 마치 검은 밤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별자리 처럼 각자의 위치에서 빛을 발한다.


이들은 이 세계에 출현하는 일종의 등장인물 같지만 맡은 바 배역이 따로 없다. 반복적으로 등장하지만 오래된 우화나 설화가 그렇듯이 특별히 상징하는 것 없고, 어떤 역할에 자신을 한 정하지 않는다. 구름을 뚫고 높은 곳으로 날아가는 새, 꼿꼿이 고개를 치켜들고 위를 바라보 는 꽃, 이들은 그저 어떤 의지의 표현일 뿐 맡은 배역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이 사각형의 세계에는 중력이 없다. 쏟아지는 빛은 있지만 그림자는 없다. 이 동일한 인물, 동일한 장소의 출현은 진지현이 만들어놓은 세계의 단면을 이룬다. 이 사각형의 세계 안에는 절망이 없다. 결말이 없기 때문에 이별도 없다. 갈필(渴筆)의 거친 움직임이 종이 표면을 간지럽히고 종이는 달갑게 붓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그의 그림이 언뜻 꽃과 새가 어우러진 화조도(花鳥圖) 같으면 서도 그저 그것들이 한데 어울려 노니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보기에는 무언가 충분치 않은 이 유가 여기에 있다. 그에게 꽃과 새는 이 사각형의 세계에 등장 하는 인물이자 동시에 존재하 지 않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수많은 순간에도 단 한 번의 쉼 없이 매순간 이어지는 움직임이 있 다. 하늘이 그렇고, 바람이 그렇고, 구름이 그렇고, 공기가 그렇다. 또 밤하늘의 별이 그렇다. 수십억 광년의 시간을 지나, 그 영겁의 세월이 우리에게 아주 잠시, 스치듯이 맞닿을 때. 진지 현은 네모난 프레임 속에 그 짧은 순간을 잡아두려 시도한다. 작가가 현실에서 느끼는 인간으 로서의 무력감, 관계에서 오는 불안, 외로움은 결국 더 나은 삶을 향한 바람과 염원에서 비롯 되기에, 그 염원을 사각형 안에 담아둔다.


그래서일까. 그의 그림은 마치 별자리 같다. 그는 별들이 직조한 밤하늘의 신비와 영적인 힘을 이 사각의 하늘로 가져온다. 진지현의 하늘에는 별들이 새와 구름, 꽃의 모습을 하고 있 다. 이들은 매 순간 쉬지 않고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하늘처 럼 그곳에 있다. 이들은 이 사각형의 세상에 등장인물이자 우리가 닿을 수 없는 장소이다. 마 치 밤하늘을 무대로 나타나는 별자리처럼, 또는 그 바람이나 공기처럼, 두 손을 모아 네모를 만들어 모서리에 가두지 않으면 잡을 수 없는 하늘처럼.


글. 이슬비(독립기획자, 미학관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