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NGSAN
김송이 Solo Exhibition
《Every Body Laughing: 프리듬 십이지장》
30. November - 21. December 2024
번역하는 몸, 휘황한 사물들
김송이는 몸을 그린다. 몸을 그린다는 것은 몸에 ‘대’해 그리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는 보편적 몸을 재현하는 대신 고유한 몸을 자기식으로 번역한다. 여기서 번역이란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언어의 교환이라기보다 비재현을 목적으로 하는 협상가능한 활동을 뜻한다. 그의 몸에는 수많은 사물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것은 은유나 상징을 통한 의미의 재현(확장)으로 접근해서는 곤란하다. 그림 속 사물들은 우리의 몸이 얼마나 타자적인가 혹은 역사적인가 혹은 무의식적인가를 드러내는 매개 장치이다. 몸은 물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 자체에 도달하기 어렵다. 따라서 김송이는 자신의 몸을 번역하려고 애쓴다. 고유한 몸은 낯설고 기이하며 다중적이고 타자적이다. 우리는 누구나 몸을 가지고 살지만, 그 몸을 경험하고 인지하고 느끼는 방식은 모두 다르다. 익숙함과 낯섦, 일반성과 고유성, 개인성과 사회성, 동일성과 타자성 사이 어딘가에 몸은 존재한다.
김송이의 고유한 몸은 물질적이다. 보이지 않는 장기나 내부, 살에 집중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보이지 않는 몸의 내부는 분명히 작용하지만, 우리는 볼 수 없다. 그러나 볼 수 없을 뿐이지 몸의 내부는 언제나 움직이고 변형되고 생성하고 소멸한다. 그것을 김송이는 방법으로서의 ‘상상적 관찰’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 방법론에 ‘물질성’을 부가할 필요가 있다. 몸의 내부는 더 물질적이다(물질성을 강도의 측면에서 사용할 수 있다면). 사회적 특성이 강한 몸의 외부와는 조금 다른 특성이 있다. 우리의 위와 심장, 십이지장을 보라. 물질성은 죽어있거나 사물화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다. 최근 신유물론에서 주목하는 능동적이고 관계적이며 생성적이라는 의미에서 물질적인 것이다. 물질은 생동하고 행동하며, 관계를 맺고 또한 끊는다. 보이는가? 김송이의 몸은 전체적이거나 유기체적이지 않다. 그것의 관계는 부분적인데, 통합되지 않고 병렬되어 있다. 그렇지만 해체된 조각이 아니며, 조작을 기다리는 죽은 대상이 아니다.
김송이의 애니메이션 <The Magic Man Rhythm>과 <Pick Your Rise 12.0>을 감상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물질성을 즐겁게 감각하는 것이다. 물컹하고 딱딱하고 기계적이고 날카롭고 까슬거리고 매끈하고 뜨뜻하고 끈적거리고 어둡고 성적이고 두툼하고 간질거리고 조용하거나 시끄럽고 우글거리지 않는가? 김송이에게 고유한 몸이란 운동하는 물질성에 가깝다. 2D 애니메이션 작업은 그의 작품을 구성하는 토대라고 할 수 있다. 몸은 입체적인데, 김송이는 몸에서 깊이를 삭제하고 평면화 한다. 그는 피부 아래 깊숙한 곳에 있는 장기를 가시화하고 평면으로 펼쳐낸다. 그것의 연원은 오랜 2D 애니메이션 작업에 있다. 만화기법은 그의 세계를 미학적으로 형식화 한다. 애니메이션과 드로잉작품을 연결해서 보는 것은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김송이의 몸은 타자적이다. 몸 안에 거울, 커피잔, 공룡, 기호, 구슬, 주먹, 꽃, 새, 발톱, 카메라 등이 있다. 즉 몸 아닌 것들이 장기가 있을 곳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왜 그런가? 몸은 자신의 것이기도 하지만, 개인의 기억과 무의식이 개입하고, 사회적 규율에 연루되어 있다. 김송이는 그 모호한 타자성을 물질적으로 번역한다. 그의 타자적 몸은 조화롭거나 행복에 겨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정상적이고 건강한 몸, 사랑하고 조화로운 몸으로 살아야 한다는 명령에 붙들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몸은 아프고, 갈등할 때가 많다. 물론 김송이는 몸의 어두운 측면에 주목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상적이 몸이 아니라 자신이 경험하고 사는 몸을 그리고자 한다. 작가는 위와 십이지장을 연결하는 수술을 받은 바 있다. 그에게 몸은 아플 수 있고 통제되지 않는 타자로서 경험된다.
왜 프리듬(Frhythm)인가? 김송이의 작업에는 리듬이 작용한다. 그것은 폴리리듬(Polyrhythm)이다. 폴리리듬은 두 개 이상의 독립적인 리듬형이 연속적으로 결합한 것이다. 이 리듬은 충돌하면서 반복되고 변주된다. 김송이는 폴리리듬을 프리듬으로 재명명하면서 연속적 강박성을 유지하되 자유를 허용한다. 그가 몸을 구성하는 방식을 보라. 자유로운 듯 하지만 일정한 리듬으로 반복된다. 몸은 여러 칸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칸 안에서 불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서사들도 폴리리듬적이다. 여러 서사들이 끊어지고 변주되면서 함께 어울린다. 김송이의 드로잉은 모두 가는 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작은 선들이 모여 검은 면으로 보이게 한다. 선들은 어떤 형태를 구성하려고 꿈틀댄다. 선의 운동 역시 프리듬적이다.
김송이의 몸은 번역-기계와 같다. 자신의 기억과 생각을 얼토당토않은 사물로 번역해낸다. 몸 안에서 우글대는 사물들은 은유나 상징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자. 몸은 사물의 세계가 된다. 휘황한 사물들로 번역된 몸은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이끈다. 위장 속에 새가 날아다니고, 저 빌딩은 피부로 감싸여 있을지도 모르는 기이한 세계로.
글. 임지연(문학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