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NGSAN

문경의 Solo Exhibition


< 그레텔과 왈츠를 Waltz with Gretel >

6. May - 28. May 2023 


  “이것은 꿈이다. 먹기 좋게 부드러운 이미지로 변형된 몸이 시각적 평면에 피신하여 무엇이든 먹어 치울 수 있는 나를 꿈꾼다. 먹는다는 행위는 더 이상 의미가 없지만, 꿈꾸는 몸은 외부에서 자원을 구해 자신을 보존하고 성장시키는 생물학적 과정을 이미지의 순환에 대입하여 삶을 이어 간다. 우리가 온갖 이미지들을 삼키고 뱉으며 형성된다는 점에서 이미지 수집가이자 제작자이며 또한 그 산물이라면, <희지스 하우스>는 그런 우리를 비춰 보이는 꿈의 집이다. 길 잃은 아이들을 유혹하는 과자의 집처럼 달콤하게 장식된 이 공간이 우리에게 먹히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를 먹기 위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렇지만 결핍을 모르는 돌과 나무의 정원이나 모든 것이 풍족한 태초의 정원은 확실히 아니다. 이 집에 충전된 꿈은 좀 더 동물적이고 유령적이다. 이미지는 불충분한 것으로 넘쳐 흐르고, 집은 게걸스럽게 굶주려 있다. 


   어째서 꿈속인데도 배가 고픈가? 그것은 이미지로는 배가 차지 않기 때문이고, 출렁이는 뱃살만으로는 그림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희지스 하우스>에 모인 몸들은 이미지의 그릇으로서 더 견고하고 유능해지길 열망하며, 무엇이든 주물러서 원하는 대로 조형하는 힘을 스스로 소유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들은 씹어 삼키는 입과 입안에 든 것 사이에서 계속 진동하고 있어서 자기가 원하는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문경의의 그림들은 무엇이든 소화할 수 있는 가상의 평면이 아니라 그런 전능함을 꿈꾸는 케이크 위 휘핑 크림, 반쯤 녹은 아이스크림, 또는 그저 물감 얼룩으로 남는다. 이미지의 질료이자 순환과 축적의 매체로서 이미 언제나 부드럽게 갈려 있는 이 몸들은 자신의 한계를 숙고하지만 어떻게 해야 그걸 벗어날 수 있을지, 과연 그런 일이 가능하기나 할지 회의적이다. 이런 태도는 이 집의 사물들이 정말로 주인인지 아니면 그들 자신도 이 집에 집어삼켜진 것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한다. 


   (중략) 더할 나위 없는 시각성의 몸체가 되어 온전히 자기만의 시공간을 확보하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특별한 사물들만 오를 수 있는 천국이 있어서 그곳에서 평온하게 세계를 관조하는 일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도 있다. 미술은 또다른 과자의 집이 아닐까? 불완전한 몸들은 허기에 사로잡힌 채 생각에 잠겨 있다.”


윤원화, 『껍질 이야기, 또는 미술의 불완전함에 관하여』, 미디어버스, 2022, 제3장 뱃속의 늑대 中


  대상을 재현하고 본질에 접근하는 태도들은 새로운 미디어의 출현으로 반복되는 혼돈의 과정을 거쳐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화나 조각 같은 전통적인 매체의 대응방식은 고순도의 함량을 기반으로 공고히 그 역할을 지켜내고 있다. 잠재된 기억을 재인식하여 부유하는 사물과 사건을 드라마틱한 편집방식으로 회상하는 문경의의 작업은, 망각되는 기억의 증거수집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의식이 무의식으로, 물질이 탈물질화 되는 연극적 접근을 디오라마와도 같은 역설적인 장치로 사유화하고 있는 것이다. 기억들을 재조립하는 과정에서 빛을 발하는 손작업의 정연함과 작가의 편집능력은 무기력한 일상의 사물과 무감동한 사건들을 존재론적으로 순수하게 분출시킨다.



   오래전 유화와 동화, 만화와 영화 등 문화 속 세계를 향한 나의 노스텔지어는, 이국적 풍경에 대한 선망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못할지라도, 그것이 종점은 아니다. 나의 열망은 살짝 뭉게진 이미지에서 나오는 울림을 향한다. 이는 인간을 묘사했지만 그다지 사실적으로 재현하진 않은 캐릭터에 열광하는 오타쿠의 열정과 닮은 면이 있다. 나 역시 캐릭터 인형이나 피규어를 모으곤 하는데, 포착할 수 없는 것(캐릭터)을 포착할 수 있는 것(피규어)과 섞음으로써 이세계(異世界)의 경계에서 혼종적으로 만들어진 창작물은, 만질 수 있으면서도 붙잡을 수는 없는 신기루라는 점에서 소유의 만족과 함께 해소될 수 없는 목마름을 준다. 

  <헨젤과 그레텔>에서 남매는 부모의 유기를 미리 알아채고 의연하게 돌을 남기며 걸어, 다시 집으로 되돌아오는 재치를 발휘한다. 비록 부모는 그 다음번 유기에 성공하고, 미아가 된 남매는 위험한 과자집에 사로잡히지만, 그레텔은 눈이 나쁜 마녀를 속여 오빠를 구하고 탈출에 성공한다. 과자로 만든 집이라는 달콤한 판타지와 아동 학대라는 비극적 현실 문제가 중첩된 이 기괴한 무대를 가상의 어린 남매가 당차게 헤쳐 나가는 모습에 우리는 열광하게 된다. 흔히 이야기는 ‘교훈’을 남긴다고 생각하지만 그 전에 주인공이 서있는 곳에 내 몸을 대입하여 세계를 모험하는 ‘체험’을 남긴다. 헨젤과 그레텔이 돌을 남기면서 숲길을 걸을 때는 우리도 그 숲길을 걸으며, 그들이 과자집을 뜯어먹을 때 우리도 함께 그것을 먹는다. 우리의 인식 체계에서 이야기는 이미지로, 이미지는 몸으로, 몸은 다시 이야기로 교차하도록 연동되어 있다.      

  이번 작품에서 종종 모델이 되었던 나의 반려묘 토미는, 그림 속 토미보다 실존적으로 훨씬 나와 가까이 있다. 그러나 토미가 무지개 다리를 건너고 나면, 그림 속 토미는 비록 따뜻하고 보드라운 털을 만질 수는 없어도, 무지개 너머의 토미보다는 조금 더 존재의 여운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그림은 유한한 인간이 또 다른 유한한 인간에게 전승하는 하나의 이야기로서, 우리의 이야기는 인간의 비언어적인 관계 맺기를 보여주는 고전으로 남을 것이다.


작가노트 中-